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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해석] 미드소마 - 현혹될 만하다 좋은정보
    카테고리 없음 2020. 2. 22.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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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드소마의 단점을 먼저 지적하면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미국 인류학과 학생이 스웨덴의 호르가 마을이라는 초견, 평화로워 보이는 종교공동체를 방문합니다. 이 영화가 공포영화라는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뻔하다. 거짓없이 끝까지 내 예상으로 친국어 자신은 없다. 더욱이[최초의 3쵸쯔의 김입니다 첫]처럼 살육 장면을 직접 보이는 것도 한번밖에 없고 결과만 보인다. 그런데 달리기고 싶습니다는 2시간 27분 이쟈싱 된다.무슨 재미로 이 영화를 봐야할까? 영화 속 마을의 진귀한 풍속을 감상하는 재미다. 이것이 정성스럽고 길게 묘사되지만 여기서 재미없으면 지루할 수도 있다. 첫부 평론가들 사이에서 20분은 클리어 해야 합니다는 내용도 자신 왔다고도 살고 있는데, 이 영화를 끝까지 그와은심로프게을 보려면 주인공들처럼 인류학적 그와은심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이 마을의 해괴한 풍속은 감독이 순식간에 만들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드소마는 유사 장르의 영화와 달리 종교공동체를 쉽게 악마화하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홀이 마을 치유의 측면을 매우 진지하게 다뤘다. 홀거 마을의 교리와 제의는 비정상적이고 악마적이지만 상당한 수준의 종교적 정합성을 갖췄다. 따라서 큰 불행을 겪고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대니가 동네에 와서 치유된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상당히 설득력 있다.이 마을에서 일어나는 야만적인 제안이 어떻게 대니에게 편안함을 줄 수 있었을까. 유사한 살인을 제안한다고 하는 문명이 역사적으로 있었다. 이 영화의 직접적인 모티브가 된 뷔페의 인신공양도 있고 남미 아즈텍의 인신공양도 있다. 그런데 이런 인신공양을 야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는 학자가 있다. 철학자 존 그레이는 꼭두각시라는 책에서 현대문명이 아즈텍의 인신공양보다 오히려 야만적이라고 주장했다. 이유는 이렇다. ​


    근대 이후 사람들은 혼돈의 세계에서 고흐가 대나무 소음을 없앤 자식이며 질서와 평화의 수립을 추구해 왔다. 그 과정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전쟁을 일으켰으며 환경을 파괴했다. 이렇게 질서와 평화를 어느 정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우울, 불안, 고독에 찬 삶을 살게 되었다. 기만적인 목표에 스스로 속은 것이다 그러나 인신공여인 아즈텍인에게는 그런 기만적인 환상은 없었다. 아즈텍인의 목표는 고인이 죽음의 소음 세계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러한 불완전한 세계를 내면에 품기 위한 방법으로 살육을 한 것이다 ​


    현대인들은 고가 결죽소음을 나쁘지 않고 나쁜 것, 명확히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을 막고 미루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한다. 이러한 경향은 근대 이후에 더욱 심해졌지만 과학의 발전으로 고가의 결사소음을 피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어떻게든 불행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물증 없는 신뢰 소음을 갖게 됐고, 역시 그렇게 사는 것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가 되었다. 문제는 아무리 도망다녀도 운명의 신에게 쫓기기 마련이고, 그때 사람들은 심각한 패닉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애써 외면하고 부인해 온 만큼 더욱 심각한 불안과 공포에 빠지게 된다. 주인공 대니와 크리스천이 불행에 대처하는 방식이 전형적인 현대인의 패턴, '부정'과 '무시'였다. 동생이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을 대니와 크리스천은 별것 아니라며 흥미를 끌기 위해 그렇게 한다고 부정한다. 대니가 가족 문제를 일삼는 것을 보고 크리스천 친구들은 관계를 끊으려고 한다. 대니는 가족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울먹이면서 나빠지기 때문에 그녀 앞에서 가족이라는 이야기를 절대로 꺼내서는 안 된다. "불행은 1단 덮고 피하고 본다"이 현대인의 좌우명이었다 하지만, "미드 소마"의 홀가 공동체는 불행을 막거나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때가 되면 당연히 죽는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대나무 소음 때문에 자연도 다르게 삶이 길어진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나쁘지 않다, 무의미해질 수도 있고, 새로 태어난 아이 형태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죽소음과 재생이 무한 반복적으로 순환되는 것이던 하지에 유럽 각지에서 열리는 메이폴 축제는 이런 죽소음(겨울)과 부활(여름)을 기리는 행사였다. 거꾸로 걷는 것은 때로 이 순환에서 반복되는 것을 상징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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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나무 소음과 고통은 인생만큼이 본인의 당연한 순환과정이므로 숨기고 부정하고 외면할 필요는 없다. 홀거마을은 이런 대나무 소음과 고통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구조화돼 있다. 인신공양의 신청은, 이러한 순환론적 세계관을 확인하고, 내면화하는 수속입니다. 그렇게 되면 죽음의 소음과 고통을 더는 두려워할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죽음의 소음을 피하려는 것은 사람, 아니 모든 생명체의 본성이 아닌가? 어떻게 그 본성을 거역할 수 있지? 물론 정상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신화와 종교의 신비한 힘을 빌면 이 본성의 역행을 이뤄낼 수 있다. 그래도 회의적인 사람은 넘기지 않겠지만 대니처럼 끔찍한 불행을 겪은 사람은 다르다. 고통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이런 신비로운 힘에 의존하는 1이 쉽게 된다. 지금처럼 고통과 불행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지 못하는 한 원시인과 고대인도 이렇게 죽 소음과 고통을 인생의 1부로 받아들이는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실제로 많았다.호가ー이 공동체에서 성장한 펠레는 대니와 단둘이 내용을 할 때마다 수어 가족의 트라우마를 자극한다. 그는 그녀에게 그 노인이 자살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대니가 외면하고 부정한 것을 1프로파일 자꾸 드러내는 것이지만 그것이 자연의 순환 과정입니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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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신론적 교리를 믿는 이곳에서는 자연도 숨쉬고 인간과 일체가 된다. 대니는 손발에서 풀이 나고 과인은 환각을 보는 한편 메이폴 여왕이 되면 온통 꽃으로 장식된 옷을 입는다. 남자친구의 크리스천도 곰의 가죽을 입게 되고, 살해된 시체는 뜰에 과인무처럼 심어져 거과꽃처럼 꾸며진다. 영화에는 이처럼 인간 고유의 개체성이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듯한 장면이 많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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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은 하 쟈싱의 원천에서 나 온 것이다 쟈싱무의 쟈싱 뭇이프처럼 자연의 부분 1뿐이라에 개체는 의의가 없는 것이었다 절벽에 떨어져 자살한 노인의 체면을 구기는 의식은 이런 개체성을 지우려는 뜻으로 보인다. 이 지방 사람들은 한 사람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느낀다. 다리가 부러진 노인이 아파 소리를 지르면 다른 신도들도 함께 울부짖는다. 크리스천과 마야의 성교 의식에서도, 다른 여자들도 함께 신 sound를 내는가 하면, 대니가 슬픔에 통곡하면, 다른 여자들도 함께 통곡할 거예요. 여기서는 내가 기뻐하면 세상 모두가 기뻐하고, 내가 상처받으면 세상 모두가 상처받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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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본인의 줄기에 매달려 피고 지는 것을 반복하는 본인의 나뭇잎과 꽃은 이런 범신론적 순환론적 세계관에서 즐겨 쓰는 상징이다. 본인 나뭇잎이라는 개체는 낙엽이 되어 사라지는데, 같은 줄기에 새로 본인 나뭇잎이 자란다. 개체는 죽지만 본인의 의무는 영원하다. 태양도 이런 세계관에서 많이 쓰이는 상징이지만 모든 생명력이 이하 본인의 원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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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별자들은 이 궁극의 근원이 1시적으로 분리된 양상을 띠고 있는 것 1뿐이었다. 개체로서의 자아 의식은 환상 1뿐 세상 만물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이는 힌두교 우파니샤드의 핵심 교리의 범 1별로(범아 일여)과도 거의 유사한 데는 그곳에서 브라만을 나무나 태양처럼 근원적인 존재로 상정하는 것입니다. 영화에서도근원thesource라는이야기가여러번나오고,마을장자를가진아이는이근원의소리를직접듣는다고하잖아요. 인간적인 인식 능력, 즉 개체성에 의한 자아 인식을 바탕으로 시야가 해1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아이를 낳기 위해 이 마을 사람들은 방안에서 근친상간을 할 생각입니다.이런 세계관 아래서는 살인도 죄가 아닐지 모른다. 죽 소음은 인간은 자연의 또 다른 형태로 되돌리는 11뿐 본질은 결말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살인을 굳이 할 필요도 없겠지만 개별자의 이기심이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다만 이런 세계관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인신공양을 제안할 때만은 예외였다. 이때에는 제상을 죽 1필요가 생기는데, 영화의 제안은 궁극적으로 평화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가운 데인 희생에 곰의 가죽을 주는 것은 인간과 같은 동물 속에 내재하는 공격성 야수성을 정화하는 의미 1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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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제안을 통해서 내가 범신론적 순환론적 세계관 속의 1부에서 모두가 근원과 연결되어 있고 계속 sound은 당연한 순환 과정 1뿐 고통은 모두가 다 같이 합니다는 점을 수용하게 되면 말 sound의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이렇게 써보면 마치 제가 이 홀이 공동체의 전도사가 된 생각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를 그렇게 만들었는데! 대니는 제안으로 치료를 받았다. 감독이 반드시 제시한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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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고통과 대나무 소리 사건에 대해 이 홀이 공동체와 매우 거의 대동소이한 해법을 제시한 사람들이 있다. 즉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다. 물론 그가 인신공양을 하려 한 것은 아니지만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처방은 홀이 공동체의 그것과 놀랄 만큼 닮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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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점에서 앨리 아이스터의 전작 유전도 엇비슷한 염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별자는 뭔가 더 큰 무언가를 전승해 연결하는 매체일 뿐, 그 역할을 다하면 소멸해 근원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는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므로 운명에 슬퍼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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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가 불교적인 감정도 많이 해. 쇼펜하우어는 힌두교 불교 이슬람 수피즘 등 동양 종교를 탐독했고 거기서 서구 문명의 염세주의를 극복하는 비결을 찾았다. 동양뿐 아니라 고대 서구에도 이처럼 유사한 범신론적 순환론적 종교가 많았다. 그러나 기독교 세력으로 이단 취급을 받으며 역사에서 사라졌다. 홀거 공동체는 이처럼 자취를 감췄던 서구권의 고대 종교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촌락의 종교적 정합성은 상당한 수준이어서 대니가 그 속에서 전갈의 평화를 찾았음을 납득할 정도다. 이런 불편한 역설 때문에 이 촌락 살인자의 뜻은 더욱 기괴하게 느껴진다. 외부인인 대니와 그의 friend들 이름에서는 기독교가 좀 매운 냄새가 난다. 대니는 구약성경 다니엘이지만 모략을 받고 사자 후드에 던져져 살아난 유대인으로 영화 속 대니와 포지션이 비슷하다. 대니의 남자친구는 노골적으로 이름이 '크리스천' 프렌드와 마찬가지로, 이름은 마크(마가), 조쉬(요호수아), 사이먼(시몬) 등 이스라엘 지도자, 예수의 제자였다."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은, 아시다시피 개별적인 불멸의 영혼이 있다는 것이었다.하과인이있고,인간은각각분리된존재였기때문에천국에가려면각자가자신이스스로노력을해야합니다. 기독교의 영혼관은 서구 개인주의 문화의 토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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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크리스티안 1행은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이며 대니가 겪는 불행을 어떻게 무시한다고만이다. 크리스천은 대니에게 그다지 의존하지 않는 남자 칭호이며 의식적이거나 서툰 것을 자주 대니에게 가스라이팅을 할 것이다. 호르가 공동체에서 온 펠레를 제외한 칭구는 우울증에 걸린 대니를 자꾸 떼어내라고 부추긴다. 고로 미드소마는 어떻게 보면 단절된 개인주의 화신들을 응징하는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미드 소마]이 모두에게 주의를 비판하는 영화 1? 그런 요소가 있긴 해. 그러나 그것은 마치[131금요일 1] 나쁘지 않는다[양들의 침묵이 살인을 비판하는 영화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것은 관객을 놀라게 하고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지 뭔가 윤리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홀거 마을의 인신공양은 경악하지만 교리에 설득력이 있다. 그 제안의 미노만성일 뿐, 여기에는 현대 개인주의 문명이 사라진 어떤 태고적 신성함 같은 것이 모두 sound를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지독한 모순 앞에 던져진 우리는 이거 현미야?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관객을 이렇게 경악시키는 것이 이 악취성을 가진 감독의 거짓 없이 계획 1것이다.유전 때도 그랬지만 미드소마는 앨리 아이스터 감독의 변태성을 더 분명하게 보여 주는 영화다. 데이비드 린치와 라스 폰 트리에의 변태성을 전승하는 걸출한 감독의 출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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